행복의 조건 – 조지 베일런트

(과거에 블로그에 썼던 글이 예스24에 남아있어서 복원함.)

 
브라쇼브에서 부카레스트로 가던 3시간 예정의, 허나 그 시간에 덧붙여 2시간동안 움직이지도 않던 루마니아의 기차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숨막히는 구성이었다거나 매력때문이 아닌, 감수자 ‘이시형’의 이름을 문득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본과 1학년 여름방학 어느 웹사이트에서 누군가 강북삼성병원의 정신과가 몹시 좋은 곳이라고 하며 ‘본좌’로 이 분의 이름 석자를 꺼내던 때였다. 그때, 나는 막막하기 그지없던 내 진로의 다른 빛을 처음 발견했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은 내가 강북삼성병원에 지원하게 된 과정의 초반부에 분명 어느 정도 기여를 한 셈이다.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한 것까지도. 극히 개인적인 연유로 참담한 실패를 연상하게 한 그 책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의 조건’이다.
 
추천사든 졸업사든 결혼식 축사든 뭐든간에, 나는 상대의 업적을 주저리 늘어놓으면서, 본인이 깊은 영향을 받았네 어쩌네 하는 것을 잘 믿지 않는다. 왠지 고지식해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진실되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시형 박사는 추천사에서 그런 방식으로 저자가 본인에 대해 끼쳤던 영향과, 저자가 한평생을 바쳤던 연구의 한 단편이자 요약이기도 한 이 책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대체 무슨 책이길래, 어떤 연구였길래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는 것이었을까.
 
책을 아버지께 드려 정확히 서술할 수는 없지만, 연구는 약 70여년(!) 동안 특정 인구집단의 삶에 대한 척도를 전향적으로 수행하였다. 이것이 왜 대단한 것이냐면, 일반적으로 특정 질환에 대한 전향적 연구는 길어봤자 2~30년 정도로써, 이것만 해도 몹시 대규모의 연구로 수행하는 집단 역시 상당히 권위를 지니는 이들이며, 엄청난 양의 연구비를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연구하는 동안 세계 대공황, 2차 대전, 냉전등의 엄청난 시대가 그 세대를 휩쓸었던 점에 비추어 볼때, 이는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장의 연구기간으로, 이 대상자들을 젊은 시절부터 80이 넘은 황혼까지 꾸준히, 또한 최대한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이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질환들에 대한 연구만큼 방대한 양의 대상자를 확보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상자는 크게 당시 하버드 재학생 일부를 토대로 시작하였으나,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들은 다른 연구까지 포함시키게 된다, 즉 비슷한 시기의 이너시티(도심주변에 부수한 슬럼을 의미한다) 거주 소년으로, 전과등의 범죄 경력이 없는 이, (이 연구는 애초에 범죄 경력자들과의 비교를 위해 시작한 연구였다) 아이큐 140이 넘는 소녀들 (역시 다른 목적으로 시작된 연구였다.)까지 포함하는데, 이렇게 포함된 두 집단을 통해 엘리트 집단이 아닌 다른 집단에서의 삶까지 설명해내려고 한다. (아이큐 140이 넘는 소녀들이 왜 엘리트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여성이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기 시작한 시점이 최소한 이 소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아니었다. 여기에 포함된 이 명석한 여성들 역시 대공황 시대에 더욱 극심하였던 성차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경우가 대다수로 보인다.)
 
이 책이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중년도, 60대도 아닌 죽음이 근처에 떠도는 7~80대의 삶이다. 이는 당연히 단편적 부분이지만, 어쩌면 그간의 삶을 반영하는 결말이 되기도 하고, 그 삶을 통합하는 요약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말을 결정하는 요소는, 그간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꽤나 다르다.
 
가장 흥미로운, 즉 예상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불우한 어린 시절, 즉 경제적인 것뿐만이 아닌 심리적인,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학대 등이 노년의 행복한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두명의 개인에 대한 연구가 아닌 수백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내린 결론이며, 저자는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던 몇몇의 예를 들어준다. 관련이 없는 것으로는 또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있으며, (비만도는 관계가 있다.) 정치적 성향 (미국이니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로 가르고 있다.) 역시 관계가 없다. 반대로 영향을 크게 끼치는 요소로는 알코올중독, 발달과업 수행 여부, 인간관계 등이 있다. 아, 방어기제(투사, 억압등의 유아적 방어기제, 혹은 억제, 승화등의 성숙한 방어기제 등) 역시 언급이 되어 있다.

내용 소개는 이쯤까지 하고, 얼핏 보면 무미건조한 연구결과에 대한 해설서에 대해 굳이 이렇게까지 서평을 달아놓는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딱딱하지 않고, 아직 20대인 내게까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를 두가지로 생각하고 싶다. 첫째, 연구 자체의 성격이다. 단편적인 연구가 아닌, 한 사람의 인생을 젊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인 성격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70여년 간 급박하게 변해온 세상에서 각각의 개인이 적응하고 반응하며 주변 이들과 상호작용하여 왔던 것을 심층적으로 관찰했던 이야기는, (오직 문답지 작성만이 아닌, 긴 주기를 가지고 한 면접을 통해서 그 깊이를 더했을 것이다.) 그 하나하나가 문학작품으로 대할 수 있을 만큼 던져주는 무게가 크다. 울림의 이유 두번째는, 저자 자신의 솜씨이다. 뻑뻑할 수 있는 연구결과를 각각의 인생에 대한 총괄로 묶어내고, 저변에 깔려 있는 심리를 찾아내고, 대상자에 대해 부인과 함께 직접 방문하여 저자의 개인적인 인상, 또한 그 인상의 변화마저도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는 모습에서 겉치레없는 진실감이 와닿았다. 특히 과거의 아픔을 딛고 성공적인 노년을 즐기는 이들에 대한 서술에서 내가 느끼는 경외와 존경은, 그 구성에서 저자가 기여한 부분이 엄청날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행복의 조건에 대해 읽으면서 느끼는 감명보다는, 그 개개인의 인생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 훨씬 컸다. 또한, 연구 결과로만은 끌어내기 힘든, (저자 역시 맞이하고 있는) 노년의 변화에 대한 촌철같은 평가들은 이 책을 단지 연구보고서로만 볼 수가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50이 넘으면 신체적으로 약해지고, 정신적으로는 완고해지면서 지금 내가 상상하고, 가끔 목격하는 온갖 종류의 노인네로 나 역시 변화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버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밀치면서 다니는 노인들, 자기 맘에 안들면 (특히 정치적으로) 소리지르면서 싸우는 노인들, 과학적으로 들어맞지도 않은 이야기에 근거없는 확신을 가지며 그것을 떼쓰며 강요하는 노인들, 내가 저런 일상을 보내게 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노년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이 책이 제시해주었다는 느낌이 들었었고, 한순간 미래에 대한 다른 예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지루한 열차와 비행기에서 뭔가 번쩍한 느낌이었달까. 이 서평은 그런 느낌이 지나간 후 한참 지난 후에 쓴 것이라 그에 대한 정확한 서술을 해낼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뭔가 객관적인 것을 제대로 전달해낸 것 같지도 않지만, 다시 한번 기억해줬으면 한다. 이 블로그는 리뷰 블로그도 아니고 그냥 본인의 기분을 서술하는 곳일 뿐이란 것을.


덧글: 이 책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중노년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나의 얼토당토않은 바람과는 달리, 책의 출판사는 아무래도 모 경제언론과 관련을 가진 것 같으며, 그 이름 역시 ‘프론티어’이다. 행복이란 것을 돈많은 이만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닐진대, 어째 이런 좋은 책을 그런 출판사가 선점하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참고로, 책의 광고 전략은 나머지 두 집단을 배제한 채 ‘하버드 대학교’에 대한 측면만을 부각시켰으며, 아주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의 정가는 현재 19,000원에 책정되어 있다. 가격을 책정하는 것에 제한을 두는 것이 멍청한 것임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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